산달림의 걷기여행과 마라톤 그리고 등산
단양팔경을 돌아 의림지, 박달재기행 본문
구담봉 옥순봉을 볼수 있는 유람선 장회나루 선착장
겨울철이라 수위가 많이 내려 갔네요.
거대한 바위절벽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봉은
단양팔경의 제3경 구담봉이다.
마치 커다란 거북이 한마리가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듯 한 형상으로
물 속의 바윙 거북무늬가 있다고 하여 구담(龜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삼선구곡의 중심지이자 단양팔경의 제7경에 속하는 중선암은
태고 때부터 바람이 다듬고,
계곡이 씻어낸 하얀 바위들이 옥빛 계류와 선연한 대조를 이루는 경승지이다.
밝은 햇살이 계곡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
하얀 바위들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눈이 부시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금세라도 사라질 것처럼 신비로운 풍경이다
중선암 출렁다리에서 아내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로 재임한 임재광 선생은
단양 출신인 고려말 대학장 역동 우탁 서생이
사인 벼슬로 재직할 당시 이곳에서 머물렀다 하여 사인암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마치 해금강을 연상케 하는 사인암의 풍광은 그 어떤 뛰어난 예술가가
그와 같은 솜씨를 부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선을 압도한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암벽 위에 선연한 격자무늬,
마치 어깨 위 날개처럼 도드라진 노송의 어우러짐은 정적인 동시에 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보는 이의 가슴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사인암 앞에서 추억 쌓기
이른아침 일출시간의 도담삼봉
삼봉은 정도전의 호가 삼봉
도담삼봉 포토존
도담삼봉은 당당한 풍채가 돋보이는
남편봉을 중심으로 아담한 모양새의 처봉과 첩봉이 양옆을 지키고 있는데
특히, 남편봉은 삼도정이라고 불리는 육각정자를 멋들어지게 쓰고 있어 더욱 그윽한 운치를 자아낸다.
도담삼봉에서는 풍광을 감상하는 즐거움 말고도 또 하나 신바람나는 볼거리가 있는데
바로 노래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음악분수대이다.
누구라도 원하는 곡을 선택해서 멋지게 노래를 부르면 거기에 맞춰 물줄기가 이리저리 춤을 춘다.
도담삼봉을 만난 퇴계 이황은 시 한수에 그 아름다움을 적어 노래했다.
山明楓葉水明沙 (산명풍엽수명사)
三島斜陽帶晩霞 (삼도사양대만하)
爲泊仙橫翠壁 (위박선사횡취벽)
待看星月湧金波 (대간성월용금파)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별빛 달빛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
혹한으로 꽁꽁언 도담삼봉
도담삼봉 위에 있는 석문
도담삼봉에서 상류 쪽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전망대로 이어지는 계단에 접어드는데
이 길을 따라 300m 쯤 숨가쁘게 오르면
무지개를 닮은 석문이 너른 품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한다.
자연의 솜씨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형미가 돋보인다.
석문가는 길에 있는 전망좋은 정자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습니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노원호님의 "강물"
제천 의림지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황 (540~575)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에 서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 못의 시초라고도 하며,
그 후 700년이 지나 현감 "박의림"이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연못 주의를 3층으로 석축을 해서 물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관이 넘을 정도의 큰 돌을 네모로 다듬어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수문기둥을 삼았고 돌바닥에는
" 박의림"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합니다.
호반둘레 약 2km, 호수면 158,677m2, 저수량 6,611,891m3,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몽리면적은 289.4정보이며,
보수 당시 수구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시대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의림지가 겨울혹한으로 꽁꽁엄
탁사정 정자
조선 선조 19년(1568)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고향에 돌아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심고 이곳을 팔송이라 명명하였고,
그 뒤 정자를 짓고 팔송정이라 하였습니다.
허물어진 팔송정을 후손 윤근이 다시 세웠고
원규상이 탁사정이라 하였으며,
팔송은 모두 죽고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으나
1999년도 10월에 팔송마을 및 제방 둑에 20그루의 해송을 마을에서 심어
앞으로 해송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제천 9경의 "탁사정"은 정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 주위의 절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루에 돌로 쓴 탁사정
탁사정자를 배경으로 소나무숲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 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 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상경길에 국도변에 있는 이천쌀밥집의 무쇠난로
오랫만에 본 학교 종
쌀밥집 주인장은 골동품 수집가(?)
약 천삼백년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신라인들이 불력으로 황룡사를 창건했듯이,
오늘날 우리 칠천만 온겨례의 숙원인 남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한국 최초로 대불사를 시작한, 호국불교의 도량, 와우정사.
'통일의 탑’ 이 돌탑속에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각국의 큰스님이
불교성지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 가져온 돌은,
고사리 손 아기불자가 얹은 돌과 가슴을 맞대었고,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에서 가져온 돌은
이름없는 늙은 불자가 얹은 돌과 손을 맞잡았으며,
쿠시나가라 부처님 열반성지에서 가져온 성석은
전국의 불자들이 가족수데로 가져와 쌓은 돌들과 한데 엉겼고,
대한민국 국회 정각회 회원 불교성지 순례단 일행이
부처님 성지에서 가져온 성보와
한국방송공사 특파원이 민족의 영산 백두와 한라에서 가져와 얹은 돌들과 맞물려 높이 거룩하게 솟았으니
동서가 여기있고 고금이 여기 있으며
지상의 성스러운 기상이 모두 여기모여 있을 것이다.
화랑도가 추구한 “미륵보살님”을 청동으로 조성한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원추형 돌탑
우리나라 불상은 아니고
어느나라(?) 혹시 소승불교 불상
각기 다른 모양의 오백나한상
오백나한상
와우정사앞 분위기 있는 음식점
용인에 있는 우리국민의 호국정신에 성지인 ‘臥牛精舍’는
우리 민족의 염원인 남북평화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실향민인 金海根 삼장법사께서 창건한 사찰
지금은 불두만 있지만 완성되면 108m
그날이 기다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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