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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은퇴농장엔‘쓸쓸한 백발’없다--홍성은퇴농장

산달림 2007. 1. 4. 16:53
공흥렬씨(76)는 요즘 꽃사슴 「단비」의 재롱에 세월 가는 줄을 모른다. 작년 봄부터 키우기 시작한 단비는 그에게는 자식이나 마찬가지.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기르는지 공씨의 목소리가 들리면 단비는 멀리서도 순한 눈을 두리번거리며 뛰어와 얌전하게 그의 발 밑에 엎드린다.

    공씨의 하루는 새벽 5시부터 시작된다. 과수원의 배나무가 잘 자라는지를 살펴보고 푸대자루 하나 지고 들판을 다니며 단비와 스무마리의 토끼에게 먹일 풀을 장만하노라면 하루가 후딱 지나가버린다.

    『예전에는 하루해가 이리도 긴가 싶었습니다. 밤이면 잠이 안와 뒤척거리곤 했는데 요즘은 9시 뉴스도 보다말고 잠들기 일쑤예요. 맑은 공기, 규칙적인 생활과 무공해 음식,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몸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산자락에 자리한 1만5000평의 「은퇴농장」(대표 김영철). 지난 95년 8월 문을 연 이곳은 정년퇴직자들이 제2인생을 가꾸는 보금자리다.

    현재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30명. 남자 22명, 여자 8명(부부 4쌍 포함)이 TV 전화기 욕실 싱크대가 갖춰진 7~10평형 원룸식 독채에서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이들의 일과는 엇비슷하다. 요즘 같은 봄이면 각자 밭으로 나가 푸성귀 씨앗을 파종하거나 열무를 뽑는다. 감자 참외 수박 참깨 배추 고추 등 원하는 품목에 따라 임대받은 각자의 밭에서 땀을 흘리거나 임대 축사에서 돼지 사슴 닭 등의 가축을 돌보기도 한다.

    농사가 없는 이들은 등산을 하거나 방안에서 난을 치고, 이도 저도 귀찮은 이들은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읽거나 사슴울타리 주변을 산보한다. 말 그대로 「꿈같은 전원생활」이다.


보증금 1500만원에 월25만원…자급자족 생활


    거름을 푸고 돼지사료를 주며 밭에 씨를 뿌리는 이들은 전직 교장선생님부터 이사관급 공무원, 대 기업 상무, 역장, 경찰서장 등 사회에서 나름대로 화려한 직책에 있던 60~80대의 은퇴자들. 그러나 여기에선 과거의 경력에 상관없이 모두가 똑같이 거름지게를 지고 밭을 매는 농군에 불과하다.

    15년 전 모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후 큰아들네 집에서 살던 공흥렬씨가 이곳에 정착한 건 95년 가을. 장남이 간염으로 죽는 바람에 쇼크받아 중풍을 앓았는데 며느리에게 병수발 시키기가 마음에 걸렸던 그는 병세가 호전되자 수원에 있는 한 유료양로원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양로원생활이 너무 무료한데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장삿속에 환멸을 느껴 1년반만에 그곳을 나왔다. 그 뒤 공씨는 친구 한명과 수원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3년간을 지냈으나 작년 봄 친구가 장가를 드는 바람에 혼자 밥해먹기가 지겨워 아파트 생활을 정리해 이곳을 찾게됐다고 한다.

    『자식들 집을 한바퀴 돌며 살아보기도 했지만, 이건 늘 나그넵니다. 남의 집 같아요. 요즘 세태가 부자지간이고 뭐고 한집에 살면 서로가 불편하고 거북할 때가 많잖아요. 며느리나 손자와도 한집에 오래 같이 있어보지 않아서 친화도 안되고…. 바쁜 세상이니까 아침 뚝딱 해먹고 제각기 흩어져서는 밤에야 마주치고…. 서로가 마음 편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려온 겁니다』

    공씨의 이곳 생활은 그야말로 안분자족이다. 보증금 1500만원 외에 식비 15만원, 관리비 10만원 (난방-전기사용료 온천비 교통비 등) 등 매달 25만원이 필요한데 이는 토끼농사와 시간당 2500원 받는 과수원 아르바이트로 충당한다.

    「은퇴농장」에선 공씨처럼 몸을 움직여 일해 자식들 돈이나 연금은 손대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매주 화요일이면 농장주 김씨가 내준 봉고차로 모두들 인근 덕산온천이나 도고온천을 찾는다. 사람들과 어울려 외식하며 활짝 웃어보는 즐거운 시간이다.

    「7학년 1반」이라며 익살스럽게 말하는 박수홍씨(71) 역시 얼굴에서 노년의 그늘은 찾아보기 어렵다. 테니스 라켓과 등산모자로 가득한 그의 방 윗목에는 어제 언덕에서 캐왔다는 고사리가 가득 마르고 있는 중이다.

    『제일 착한 며느리 갖다주려고 고사리며 약초를 따서 말린다』는게 박씨의 말. 일흔살이 넘은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한 그도 역시 넉달 남짓한 이곳 생활에 「대만족」을 표시한다.

    『내년엔 밭을 200평쯤 빌려서 약초재배를 본격적으로 해볼 참』이라고 한다. 시간이 나면 붓글씨를 쓰거나 자신의 차로 가까운 곳을 드라이브 하는게 즐거움이다.

    이곳은 사방이 야트막한 산이라 산보하기에 알맞다. 직장암 치료를 받고 있는 아내도 조금만 호전되면 이곳으로 데려올 계획이라 한다.


“살맛 난다”이구동성…‘노후대책’ 모범사례로


    「은퇴농장」에선 쌀과 쇠고기를 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한다. 95년에는 토종닭 계란 김치 표고버섯 쪽파 각종나물류 등을 묶어 서울과 대전지역 아파트를 대상으로 먹거리장사를 했지만 농사와 노동을 의무로 하지 않는 이곳 규정상 수요 공급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은 중단한 상태.

    요즘은 가축판매와 수확작물의 판매 방안을 놓고 농장주 김씨가 묘안을 짜내고 있는 중이다.

    이곳에서는 밭일과 가축기르기 등이 조직적으로 이뤄진다. 참깨 들깨 쑥갓 등 밭마다 3~5명이 한 팀이 되고 「젊은이」축에 드는 60대 초반이 팀장을 맡고 있다.

    농장주 김씨가 트랙터로 밭을 갈아 주면 노인들은 파종 김매기 잡초뽑기 등을 한다. 물론 100% 거름으로 기른 유기농법 채소들이다. 밭 임대료는 수확량의 절반을 나누는 것으로 계산한다.

    은퇴하면 염소를 키우며 살고 싶었다는 전직 공무원은 『더이상 바랄게 없다』고 말한다. 자식 손자들이 모두 나가고 혼자 앉아 식사하는게 너무 싫었는데 직접 기른 채소와 잡곡으로 함께 모여 식사하는 이곳에선 밥맛이 절로 당긴다고.

    어버이날에 자녀들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1박2일 여행계획이 잡혀있고 일년에 한번 있는 6월 중순의 오픈하우스날엔 감자캐기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가족들을 초대해 한나절 동안 감자도 캐고 닭도 서른마리쯤 잡고 살찐 돼지도 한마리 잡아 들판에서 바비큐잔치를 즐길 생각에 이들은 벌써부터 마음이 부푼다.

    『치과의사 하는 아들놈이 처음에는 무척 반대했어요. 그러다 내려와서 막상 내가 사는 것 보고는 「나중에 제가 따라 내려갈테니 아버님이 거기에서 먼저 뿌리를 내리고 계시라」고 하더군요』 상조회 회장을 지낸 이모씨의 얘기다.

    서구에서는 은퇴자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들이 마련돼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은퇴 모델이 마땅하지 않다. 기껏해야 양로원 수준인데 그런 정도로는 「눈이 높아진」 은퇴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은퇴농장」의 운영사례는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김 희 경/ 자유기고가>
출처 : 은퇴농장엔‘쓸쓸한 백발’없다--홍성은퇴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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