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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달림의 걷기여행과 마라톤 그리고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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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산행/쓰꾸낭산

[스크랩] 쓰구냥산 산행기

산달림 2005. 9. 8. 17:32

 참가자:이준우(대장), 김정옥, 이성식, 김사규, 이상용, 조인순, 국경희, 조운묵, 서정우 
                        2001년 7월 14일(토요일)

    올해도 우여곡절 끝에 9명이 인천공항에 도착함으로서 우리의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은 장마철이라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우리의 비행기 SZ436편도 23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비행기는 계류장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었다. 창 밖으로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다가 도로 내리지나 않을까 , 비행기는 제대로 날 수 있을까 걱정을 하였으나 1시간 여를 지체한 끝에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하였다. 성도까지는 2시간 거리라 비행기는 바로 성도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곳 날씨는 아주 좋았다. 밤이 깊은지라 우리는 바로 현지가이드를 따라서 1시간여 거리에 있는 신양호텔에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었다.

                          2001년 7월 15일(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방에서 성도시내를 보니 94년도의 북경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개발의 바람이 이곳 성도까지 밀려와 곳곳이 파헤쳐지고 공사 중이었다. 오늘은 차를 타고 일륭까지 이동하는 일정이라 마음도 가벼웠다. 7시에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한 후 8시에 버스를 타고 일륭으로 향하였다. 성도는 해발 600m의 너른 분지이다. 도시는 도강언에 도착하기까지 평지가 넓게 분포되어 있었으며 곳곳이 공사중이었다. 도강언을 지나자 도로는 좁아지고 더구나 도강언에 댐을 만드느라 도로를 다시 만들고 있어서 도로가 엉망이었다.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라 차들이 없어 그래도 수월하게 지났다고 가이드가 이야기한다. 도중 길은 구채구 가는 길과 갈라져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갔다. 차는 개천을 따라 이어진 길을 크락숀 소리도 요란하게 잘도 달린다. 개천이라도 물살은 무척 거셌다. 개천 양옆은 거의 양배추 밭이었고 지금이 수확철이라 양배추를 실어 가기 위한 작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小金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차는 도충 와룡에 도착 웅묘공원을 구경하였다. (11:00)   중국 국보1호 팬더를 야생 상태서 관리하는 곳이었다. 중국 팬더의 40%는 이곳 사천성에서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곳 웅묘공원이 팬더사육의 중심지라고 한다. 산 중턱을 가로질러 야생 상태의 팬더를 관찰하는 코스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중국인 특유의 상술이 발휘되고 있었다.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데 50불 야생 코스 중에서도 우리 안에 들어가는 데에도 별도의 돈을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팬더 구경을 마치고 주차장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하였다. 원형 테이블에 8가지 정도의 반찬이 나왔다. 그런대로 먹을 만은 하였으나 몇은 젓가락질만 하였다. 대관령 길은 명함도 못내미는 산길을 차는 잘도 올라간다. 오르는 중간 물이 흐르는 곳에는 차를 식혀주고 돈을 받는 장족이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곳곳에  산사태 난 곳도 잘도 피하며 차는 드디어 4523m 파랑산 능선에 올라섰다. 중간에 소나기가 오다가 그치다가 하였다. 고압선 철탑도 함께 능선을 넘고 있었다. 능선에는 당집이 있었다. 능선 근처의 산은 편마암으로 이루어졌다. 너덜이 산세를 더욱 날카롭게 느끼게 한다. 능선을 넘자 길은 이내 내리막 길이었다. 초원지대에 흙 길이 구비 구비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구절양장 바로 그 길이었다. 완만한 계곡은 초원이었고 군데군데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차로 능선을 넘어 왔는데도 고소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절벽 길을 차는 잘도 달린다. 내리막 길에서도 차를 한번 더 물로 식혀 주었다. 계곡 거의 다 이르러 길은 우측으로 능선 허리를 돌아 이어져 있었다. 계곡 반대편에 마을이 나타나고 쓰구냥산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왔다. 일융이었다. 3시30분 일융 흠흠호텔에 도착하였다. 일융은 계곡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마을이었다. 산 능선을 깍아 계단식 밭을 일구었고 유채꽃이 노란색을 더하였다. 여기서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로공사, 건축공사 등 인력으로 하니 만만디였다. 곳곳에 사태가 나서 벌건 흙이 드러나 있었다. 개천 변에도 우리가 보기에는 무질서하게 집들을 짓고 있었다. 마을 구경을 나섯다. 옆에 바로 민속물건을 파는 점포가 있었다. 아직은 때가 덜 묻음 느낌이었다. 10여분 다니니 마을 중심부는 다 구경할 수가 있었다. 7시 호텔에서 저녁을 하였다. 8시가 되어도 아직 날은 밝았다. 밤이 되니 호텔 앞에서 장족 식당 종업원들이 민속춤 공연을 하였다. 외부 투숙객들을 위한 배려인 것같아 아주 즐거웠다. 관광객들도 따라할 수 있는 집단 무용이었다. 밤이 늦어서도 춤은 계속 되었다. 우리는 내일의 산행을 위하여 중도에 들어와 잠을 청하였다. 이곳 일융도 해발 3180m라 만만치는 않았다.

                       2001년 7월 16일(월요일)

    8시15분 장평산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료(35원/인)를 구입하고 드디어 쓰구냥산 등산의 첫발을 디뎠다. 날씨는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오늘의 목표는 노우원자 까지라 여유있게 출발 하였다. 장평구 찻길을 따라가니 8시23분 오른 쪽으로 장족 텐트가 하나 특이하게 처져 있었다.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니 돈을 달라고 한다. 알고 보니 찻집이었다. 다리를 건너 산 쪽으로 붙으니 산을 오르는 능선길이 나타난다. 능선 길을 따라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 되었다. 우리의 짐을 실은 말들도 같이 힘들게 올라갔다. 노새보다는 조금 큰 것 같았다. 전망이 조금 트인 곳에서 눈에 덮힌 쓰구냥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얼, 싼, 쓰 네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으로서 우리가 오르는 봉우리는 네번째 봉우리인 것이었다. 숨이 헉헉차는 오르막길을 우리는 천천히 올랐다.  9시30분 드디어 능선 안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멀리 쓰구냥산 전경도 그림처럼 아름답게 시야에 들어왔다. 멋진 풍경이었다. 아래로는 일륭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반대편에는 어제 우리가 지나온 도로가 허리를 자르고 있었다. 육산 봉우리 끝에는 당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뿐 아니라 말들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다.  9시40분 초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책하듯이 걸어 갔다. 초원에는 무수한 야생화들이 활짝 피어 화려함이 절정에 다다랐다. 발걸음이 저절로 상쾌하다. 등산로는 능선 오른쪽 8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10시40분 2번째 휴식을 취하였다. 도중에 말을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가 있었다. 거의가 일본 사람들이었다. 산책 코스처럼 좋은 길이지만 고소증세 때문에 숨은 가빠서 우리는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초원 여기 저기에는 야크들을 방목하고 있었다. 능선 쪽에는 나무 숲들로 이루어진 곳들도 있었다.  11시40분 가지고 간 도시락으로 점심을 하였다. 12시 오른쪽 봉우리가 매가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는 잉거산을 지나쳤다. 조금 더 지나쳐 숲 속으로 들어가니 계곡 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숲은 거의 없고 능선 상은 초원으로 이루워 졌다. 1시 드디어 앞 저 아래에 텐트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늘의 목적지인 노우원자(3600m)이다. 초원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이곳까지 왔다. 왼쪽 능선을 오르면 정상가는 길이다. 우리는 오른쪽 아래로 내려갔다. 1시30분 드디어 노우원자에 도착 하였다. 돌로 된 집이 한채 있었고 나머지는 텐트가 20여동 쳐 있었다. 알고 보니 전부 일본  사람들이 쳐놓은 텐트라고 한다. 한여름 내내 매일 같이 올라오고 내려가고 한다고 한다. 계곡 가운데로는 폭 10여m 되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냇물은 물살이 매우 빨랐으며 물도 차가웠다. 돌집 바로 옆에 산에서 흐르는 물을 파이프로 받아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평지를 다 차지하여 우리는 비탈에 텐트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짐을 지고 온 말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일륭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내일의 산행을 위하여 술도 먹지 않고 고소적응을 하느라 노력하였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도 하고 냇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한 회원은 밤새 고소증에 시달려 결국은 정상 정복을 접어야 했다. 밤에도 별이 총총하고 날씨도 아주 좋았다. 내일도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운에 맏기는 수 밖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중에서도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2001년7월17일(화요일)

    5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주위는 아직 어둠에 휘싸여 있었다. 아침에는 조금 서늘한 느낌이 들어 방한복을 입었다. 6시가 되어서야 사방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서둘러 6시10분에 정상을 향하여 오늘의 등산을 시작하였다. 김학권 현지 가이드도 정상 정복에 나섰다. 날씨는 맑았다. 우리는 어제 내려왔던 길을 다시 능선까지 되짚어 올라가(6시25) 오른쪽으로 능선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숲이 우거져 있고 야크들을 방목하느라 길이 여러 곳으로 나 있었다. 하여간 능선 오른쪽 안부로 난 길을 따라 올라 조금 넓은 공터에서 방한복을 벗고서 간편한 복장을 하였다. 노우원자가 바로 아래에 보였다. 직선으로는 계곡이라 등산로는 오른쪽 8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계곡 건너 멀리 보이는 앞산도 경치가 좋았다. 등산로는 초원지대라 야생화가 많이 피어 눈은 즐거웠으나 한발 한발 올라 갈수록 숨은 더욱 차서 걸음은 더디어 졌다. 초장부터 이러면 안되는데. 7시30분 능선사이 중간 안부상에 이르니 초원의 야생화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오른쪽 능선은 쓰구냥산에서 바로 이어져 내려온 능선으로 노우원자 윗쪽으로 이어졌고 왼쪽의 능선은 우리가 올라온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곡 너덜 물을 좌우로 건너며 등산로가 이어져 있었고 앞쪽 저 멀리 쓰구냥산군들이 압도하듯 시야에 들어온다.  4000m, 609기압, 온도는 16도가 나온다. 야크들이 군데 군데 방목하고 있는 초원사이로 여기 저기 길들이 나 있으나 좌 우 능선사이의 넓게 퍼진 초원지대라 야생화와 전경들을 감상하면서 쉬엄 쉬엄 올라갔다. 고소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8시25분 개천 옆에 있는 큰바위가 있는곳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앞 왼쪽에 보이는 능선은 바위산으로 밑에는 부스러져 내린 돌들이 너덜을 이루고 있었다 초원도 거의 사라지고 너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정상에 다가옴을 느낄수가 있었다. 8시50분 드디어 텐트터에 도착하였다. 과도영이다.  이곳부터 위쪽으로는 너덜지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뒤로 우리가 올라온 등산로는 초원으로 탁 트여져 있었다.  좌 우 능선이 온통 바위와 흘러 내린 돌들로 너덜을 이룬 사이에 앞에 저 멀리 빤히 보이는 안부를 향하여 마지막 힘을 다하였다. 9시30분 드디어 너덜 오르막길에 들어섰다. 587기압 숨이 점점 가빠진다. 쉬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우리의 산악가이드 마국병은 성큼 성큼 잘도 오른다. 내가 힘들어하니 내배낭을 자기가 지고 간다. 덤으로 비디오 카메라도 맡긴다. 포인트마다 마국병을 불러 비디오를 찍고 또 맡기곤 한다. 거의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 휘청 올라간다. 11시 드디어 안부에 올라섰다. 바로 앞에 얼음에 덮인 이구냥산의 봉우리가 우뚝서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옆 오른쪽으로 이어서 얼구냔, 싼구냥, 그리고 우리가 오를 쓰구냥이 이 안부 오른쪽 능선에 있었다. 안부 북사면에는 눈이 그대로 있었다. 능선너머 왼쪽 계곡은 바로 일륭 장평산 매표소에서 찻길로 이어진 계곡이었다. 북쪽으로는 고봉들이 시커먼 구름을 머리에 이고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안부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건만 눈밭 사이로 난 등산로를 지나 마지막 너덜을 오르는 길은 힘이 들었다. 한 걸음 걷고 한참 쉬고 11시50분 드디어 정상(5355m)에 도착했다. 시야가 탁 트여 그동안의 힘든 것도 다 스러진다. 큰 너덜울 세워 서울등반대라 쓰고 그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국병이 웃옷을 벗고 기념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전혀 춥지가 않았다. 무사히 전원이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한 후 12시40분 하산을 시작하였다. 하산은 자신 있으니 올라올 때와는 반대로 이제는 내세상이었다. 마국병에 맡긴 배낭과 비디오도 도로 찾았다. 올라갈때 미처 보지 못한 경치들을 한가롭게 구경하였다. 현지가이드 김학권이 다리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2시 텐트터에 도착하였다. 일본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왕복 5시간이 걸렸다.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무나 우리는 하루에 끝내려는 것이다. 내려올 때 보니 야생화들이 참 많이 피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못보던 꽃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의 등정도 무사히 끝내고 노우원자 까지의 일정이라 내려오는 길은 느긋하기만 하였다. 4시에 노우원자에 도착함으로서 우리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저녁에 부담 없이 마시는 술은 꿀막이었다.

                             2001년7월18일(수요일)

    오늘 일정은 대해자 소해자 관광이라 느긋하였다. 7시45분 대해자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계곡을따라 오르는 길이었다. 길은 왼쪽 3부 능선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등산로 양 옆에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8시42분 대해자에 도착하였다. 넓은 호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야크를 기르는 집이 한 채 있었다. 돌로서 울타리를 쳐 우리를 만든 것은 밤중에 맹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집은 돌로서 지어 있었고 사람과 가축이 공존하고 있었다. 방목철에만 사용하는 곳이라 살림은 특별히 없었다. 부모는 젓을 짜고 있었고 어린 남학생이 부모를 돕고 있었다. 다시 3부 능선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다시 시야가 터지며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10시, 화해자에도 집이 한 채 있었다. 집이라야 납작한 돌로 울타리를 쌓고 지붕을 얹은 단순한 것이었다. 우리의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이다. 여기서도 야크를 방목하고 있었다. 어린 여학생 하나가 자랑스럽게 책을 읽어 보인다. 야생화가 피어있는 경치가 주변과 어울려 별천지를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마냥 자연을 즐겼다. 산을 목적하지 않아도 이곳만 보아도 여행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을 만 하였다.  아직까지 이렇게 많은 야생화를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화창한 날씨마저 우리편이니 무릉도원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시50분 우리는 호수를 건너 계곡 반대편 길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11시 40분 노우원자로 돌아왔다. 우리는 여기서 수제비로 점심을 하고서 하산을 준비하였다. 우리를 태우고 갈 말들은 벌써 올라와 기다리고 있었다. 텐트를 걷고 짐을 싸고 장족이 고삐를 잡은 말에 올라 탐으로서 1시30분 하산을 시작하였다. 올라갈 때는 몸을 앞으로 하여 힘을 덜어주고 내려가는 길은 몸을 뒤로하여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이 말타는 요령이었다. 처음 타보지마는 전혀 낮설지가 않았다. 중간 휴식중에 장족 아가씨가 노래를 청아하게 부른다. 고산이라 요들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것 같았다. 백내장이라 한쪽눈이 보이지를 않는다고 한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말타고 초원을 내려가는 맛이란 기분이 그만이었다. 말들은 고삐를 놓아도 저혼자 길을 따라갔다. 3시50분 능선 끝까지 왔다. 장족 아가씨에게 한맥수건을 기념으로 주었다. 즐거운 하산이었다. 여기서 말들과 장족 말잡이들과 작별하고서 가파른 길을 따라 장평구 길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4시30분 호텔에 도착함으로서 우리의 쓰구냥산 등산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호텔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기분을 전환하였다.  이틀동안 산에서 지내고 정상까지 다녀왔는데 그동안 땀이 나서 몸이 끈적인다던가 씻어야 된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장족들이 가축들과 어울려 산속에서 씻지도 않고 지내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토불이, 환경에 적응하여 살게끔 자연는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산행가이드 마국병의 집은 코너 2층집이었다. 1층 점포는 세를 주고 2층은 민박겸 산행가이드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지낼수로 때묻지 않고 순수하였다. 자기가 술을 한잔 산다고 하여 자기 점포에서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가이드들과 서로 선물을 주었다. 나도 가지고 간 옷을 마국병에게 주었다. 마국병은 양털 중절모자를 우리 모두에게 하나씩 선물로 주었다. 2차는 우리 호텔에서 베풀었다. 우리는 양을 한마리 잡아 가이드들과 호텔 식구들과 축배를 들었다. 호텔 지배인도 술을 한상자나 주었고 종업원들은 축하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하여간 우리는 부담없는 즐거운 저녁을 보낼 수가 있었다. 밤중에 오늘도 호텔 앞에서는 장족 무용이 펼쳐졌다. 우리도 부담없이 그 속에 어울려 즐거운 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술을 먹지 않으면 할 일이 없는데 이들은 집단으로 잘들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이런 문화가 생겼으면 하고 부러운 마음이 든다. 멜로디도 단순하고 춤사위도 간단하여 누구나 따라하기가 수월하였다. 우리도 어느새 일행이 되었다. 아쉬운 밤이었다.

                             2001년 7월19일(목요일)

    오늘로 이곳 쓰구냥산과 일륭호텔에서의 즐거운 추억을 뒤로하고 다시 성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하였다. 계속 현지식을 못먹는 일행이 있어서 만두와 계란은 인기였다. 그런데 소금이 없었다. 소금을 중국어로 무엇이라고 하나. 한자로 鹽자를 써도 모르고 ,salt도모르고, 계란을 찍어먹는 시늉을 해도 모르고 결국에는 소금을 얻어먹지 못하였다. 나중에 현지 가이드에 물어보니 간자로 흙토 점복 그릇명자를 쓴다고 한다. 자기도 간자밖에 모른다고 한다. 한중일 삼국이 빨리 한자를 통일하여야 하겠다. 그래도 마국병과는 며칠 같이 지내니 눈치로 의사소통이 이루어 진다. 우리는 모두에게 작별을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파랑산을 넘었다. 이제는 고소 적응이되어 견딜만 하였다. 파랑산 정상에 시커먼 구름이 걸리고 비가 오락 가락한다. 비가 오던 소낙비가 내리던 이제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다. 도강언 근처에 이르니 길이 많이 밀린다. 고장난 차를 길 한가운데 세워 놓고 그대로 고치고 있었다. 예의 그 크락숀 소리와 이중 추월은 압권이었다. 차는 힘차게 잘도 달려 도강언에 이르러 점심을 하고 성도를 지나 낙산을 향하여 계속 길을 달렸다. 성도에서 낙산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로 시원하게 달릴 수가 있었다. 낙산에 도착하니 왼쪽으로는 아미산 오른쪽으로는 낙산대불 이정표가 보였다. 낙산다리를 건너 대불쪽으로 가다가 왼쪽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하였다. 식당뒤 주차장 공터에서는 여인들이 마작을 하고 있었다. 저녁을 한 후 길을 되돌아와 산만호텔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볼링도 하고 술도 한잔씩 하며 가볍게 지냈다.

                              2001년7월20일(금요일)

    오늘의 일정도 느긋하니 마음이 편하다. 낙산 유람선을 타기 위하여 선착장으로 향하였다. 유람선 출발은 마음대로이다. 1시간 정도 기다려 사람이 어느정도 타니 출발한다. 강 건너는 낙산 시내의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도열해 있다. 배를 타고 강에 나오니 멀리 낙산의 모습이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더 가까이 가니 절벽에 굴을 파고 부처님을 조각해 놓은 모습과 계단이 시야에 들어 온다. 암벽사이 공간에 81m짜리 거대한 부처가 조각되어 있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부처는 그리 정교하지는 않으나 세계 최대로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었다. 불상 주위 양옆 절벽에는 계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유람선에도 예의 상술이 있었다.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는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고 그옆은 필요없는 그늘막을 만들어 사진을 찍기 불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걸어서 낙산을 구경하였다. 우리가 배에서 본 산 전체가 능운사 경내였다. 예의 향을 무더기로 태우고 있었다. 해통스님이 조성 하였다고 한다. 도교도 함께 모시고 있었다. 낙산 대불 수리 과정을  전시해 놓았다. 대웅전을 구경하고 나오니 바로 대불 머리쪽 높이였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세멘으로, 굴로 판 계단도 있었다. 바닥에 내려와 사진찍는 대에서 사진을 찍고(신통하게 돈을 안 받음) 반대편 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유람선에서 볼 때 잔도같이 보이는 부분이었다. 해통선사가 수도하던 조그만 굴이 있었다. 종루가 있었고 정원을 가르는 철망에는 자물쇠가 수없이 걸려 있었다. 복이 달아나지 못하게 자물쇠를 잠그고 열쇠는 멀리 버린다고 한다.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웅대한 규모애는 다시금 경외의 마음을 느끼며 능운사 구경을 마치었다. 입구에 13층탑이 봉우리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전탑이었다. 유람선에서 보면 하복부의 단심이었다. 이 탑을 끝으로 낙산대불 관광을 마치고 다시 차를 타고 성도로 돌아왔다. 이제야 성도 중심부를 지나칠 수 있었다. 태평양백화점에 있는 한식당에서 점심을 하였다. 전골과 김치, 된장찌개를 들었다. 관광공사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내준 유일의 식당이라고 한다. 점심을 끝내고 호텔까지 걸었다. 자전거 천국이었다. 자전거 주차장도 있었고 주차비도 받고 있었다. 인력거도 많았으며 곳곳이 공사중이었다. 도시 전체가 활력에 넘쳐 있었다. 두보(712~770)초당  ***안사의 난을 피하여 760년부터 약4년간 거주하며 240여수의 시를 지음. 지금의 사당은 11세기애 완성된 *** 을 관람하였다. 두보 시라도 한줄 알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대나무가 많이 있었고 신주로 만든 두보상은 손을 하도 만져 반질 반질 하였다. 또 다른 두보 흉상은 수염이 반질 반질 하였다. 매장에는 완화부인상이 눈에 둘어왔다. 상인들은 우리에게 "2천원 이예요 "를 한글로 써달라고 한다. 예의 상술이 나온다. 두보초당 관광을 마치고 쇼핑코스 무후사 옆에 있는 찻집을 들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차들을 많이 선전하고 있었다.

                               2005년 7월21일(토요일)

    무후사 관광에 나섰다. 앞쪽에 유비현덕의 사당이 있었으며 양옆에 그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의 조각상이 있었다. 출사표도 조각되어 있었다. 뒤에 무후사가 있었다. 삼의사와 도원결의도 있었다. 정원을 돌아 나오니 무후묘가 있었다. 삼국지의 구절 구절들이 떠오르며 그 당시를 회상하게 한다. 아직도 제갈량(181~234)은 중국사람들 아니 우리들 마음에 살아있다. 이로서 우리의 여행 일정을 모두 마치고 1시 성도공항에 도착하여 2시30분 SZ435편으로 출발하여 6시45분 인천공항에 도착함으로서 우리의 올해 등반을 무사히 마칠수가 있었다.


 
가져온 곳: [김정옥]  글쓴이: 김정옥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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