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달림의 걷기여행과 마라톤 그리고 등산
인도 독립의 기폭제가 된 잘리안왈라 공원 본문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1919년 4월 13일 영국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집회금지법'에 항의하던 인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된 장소가 잘리안왈라공원이다. 암리차르의 황금사원 입궁에 있어 황금사원 가는길에 들렸다. 당시 인도에 집회금지법이 발효된 배경은 1912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은 인도에서 자치권을 주면서 전쟁비용을 부담시켰다. 전쟁이 끝나면 당연히 전비부담이 끝날줄 알았던 인도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계속 전쟁비용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자 약속위반에 항의하는 인도인들의 시위는 줄을 이었다. 그래서 만든 법이 '집회금지법'이다. 영국의 본토라면 말이 안되는 법이 식민지라는 이유로 인도인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누려야 할 시민의 귄리를 박탈당한 인도인들이 법안에 대해 맹열히 항의를 하였다.
당시에 영국군을 지휘하던 다이어(Dyer)는 '대영 제국의 신성함'을 보여 주겠다며 무장을 하지 않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였다. 단지 항의시위자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그날의 발포로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자치'냐 '독립'이냐로 망설이던 인도 국민의회의 투쟁 방침이 독립으로 기울어 지는 결과를 낳은 것은 물론 이 사건을 계기로 상대적으로 온건한 전술을 구사하던 마하트마 간디까지 대영 불복종 운동의 불길을 당기게 하였다.
잘리안 왈라 공원의 입구에 있는 우물에는 영국군이 갑작스러운 발포에 당황한 인도인들이 총알을 피해 우물로 뛰어 들어 차곡차곡 깔려 초대형 압사 사건이 발생한 비극의 장소로 이 우물 안에만 무려 120구의 시체가 나왔다고 한다.
이날 구성된 영국군은 지휘자인 다이어 장군을 제외하면 모두 네팔계 용병이었다고 한다. 식민지라는 같은 아픔을 겪는 두민족이 명령에 의하여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일은 서로의 아픔이 었다.
잘라완 왈라 공원 입구
길거리의 과일 노점상
암리차르의 버스 터미널
거리의 과일 노점상
거리에서 마주친 회교 사원
시크교도 동상
북을 치는 시크교도
여인들의 춤사위
잘리안왈라 공원입구 추모 동상
1919년 4월 13일 총을 쏘는 영국 용병들
잘리안왈라의 당시 모습
잘리완왈라 공원에서 만난 사크교도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있다.
추모비 앞에서 휴식중인 암리차르의 시민들
120명이 총탄을 피해 뛰어든 우물(Martyrs Well)
이 우물안에 120명이 총탄을 피해 뛰어든 시신이 120구였단다.
총탄 흔적
총탄 자국 흔적도
공원에서 밖으로 나가는 담인 이 벽에 수많은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그날 그 사건을 기억하는 공원내 노거수
그 둥치가 어머어마 하다.
공원 곳곳의 벽에는 당시 총탄 흔적이 있다.
탄흔의 표시
빨간 옷을 입고 붉은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
추모비 그리고 그 앞의 물놀이장
데이트 중인 시크교도
추모비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인도 아가씨들
공원내 곳곳에 그날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
잘라완왈라 공원의 풍경
끊임 없이 찾아드는 잘아완 왈라 공원 그날을 기억하자는 인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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