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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는 어떤 거처에서 편안히 머물며 휴식하는 거주와 반대 의미다. 달리며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주자를 길을 따라 어딘가로 떠나는 나그네로 변모시킨다. 역마살이 끼어 집도 절도 없이 운동화 밑칭이 다 닳도록 겉잡을 수 없이 떠도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달리는 사람은 집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우주 속에 거처를 정하고 있다.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장악하므로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달리기라는 이동수단을 통해 달력의 시간과 맞서서 자신의 양보할 수 없는 인간적 권능과 사회적 독립성을 앞세운다.
단조로운 풍경과 산란한 마음으로 늘어나는 권태의 발소리에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조바심도 있을 때가 있지만, 권태 역시 하나의 조용한 관능적 쾌감일 수 있고, 정신 없이 돌아가는 복잡한 세상을 벗어난 잠정적인 철수 상태를 즐길 수도 있다.
달리는 사람은 시간 부자다. 한가롭게 강가를 달릴 수도 있고, 집 뒷산을 한 바퀴 산책로를 따라 돌고, 도시의 도로를 통과하고, 조깅로 곁의 음수대 그늘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자기 시간의 단 하나뿐인 주인이다.
자신의 시간 속에 몸을 당구고 세상을 유영한다. 발걸음의 이동은 덧없음의 고뇌를 진정시켜주고, 하루에 30km를 달려갈 때는 달리는 시간을 주간 단위로 계산하지만, 만약 같은 시간을 KTX나 비행기로 이동한다면 그런 인생 자체를 시간 단위로 계산할 것이다.
지난해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를 출발해 1년2개월 동안 16개국 1만6000km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중국을 지나고 있으면서 북한을 거쳐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올 마지막 여정이 아직 미정인 통일기원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의 상황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도 있다.
끔찍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시간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길들처럼 달린다는 것은 어떨 때는 어쩔 수 없는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달림이들에게는 누구에게 무엇을 보고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는 자유인이다.
달리는 것은 기회와 가능성의 주체로서 흘러가는 시간의 예술, 길을 따라가며 수많은 발견을 축적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의 나그네 삶을 즐기는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이 보내는 삶, 그것이 바로 영원이다.
오직 배고픔만으로 시간을 측정하고 잠이 올 때에야 비로소 끝이 나는 울트라마라톤을 달리는 주자들이 겪는 여름날 한나절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길을 달려가다 보면 시간의 길이에 대한 일체의 감각이 사라져버린다. 달려가는 주자는 자신의 몸과 욕망의 척도에 맞추어 느리게 시간 속에 잠겨 있다. 혹시 서두를 때는 오직 기울어져 가는 석양보다 더 빨리 가야겠다는 서두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