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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달림의 걷기여행과 마라톤 그리고 등산

청이당 가는 길 본문

국내 산행/경상도

청이당 가는 길

산달림 2021. 1. 28. 17:30

밤머리재에서 잘 잤다. 식수는 어젯밤에 물탱크 물을 떠서 사용하기로 했다. 종이컵을 들고 얼음을 들추고 틈 사이로 컵을 넣고 물을 퍼 담았다. 담아 놓고 보니 물탱크 청소를 하지 않아 바닥의 침전물이 섞여 물이 흐리다. 하룻밤 재워 두면 내일 아침에는 먹을 수 있겠다. 침전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물병을 세워두고 잤다.

 

산청읍내 옆에 자리한 왕산과 필봉


밤에 받아 둔 물은 침전물이 가라 앉아 식수로 사용할 수 있었다. 커피까지 한잔 마시고 출발이다. 고갯마루에서 잤으니 아침부터 된비알인 오르막길이다. 하루 쉬었다고 그리 힘들지 않는다. 쉼은 회복의 시간이다.

어제부터 산에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다. 같이 있으면 내 생각대로 살수가 없고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 혼자는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외롭다. 외롭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독불장군은 없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혼자라 편리한 시간에 길을 나설 수 있다. 지금은 외로움을 즐기는 시간이다. 외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면 상대를 배려하는 법도 배운다.

왕등재 가는 능선과 왕등재


왕등재로 가는 길은 안내표지 하나 없는 오지길 그대로다. 그 흔한 표지 리본 하나 없는 자연의 길이다. 이런 길이 좋다. 혼자 걷는 길은 내가 힘들 때 까지 걷는다. 누가 쉬어가자 말하는 이도 없다. 생각에 빠지면 1시간도 넘게 걷는다. 홀가분한 길에는 산행 속도가 빠르다.

왕등재는 왕듸기재라고도 하며 왕등재 혹은 왕등티라고도 불렀다. 구형왕이 전쟁 중에 군사들을 이끌고 머물렀던 곳이라 하고 왕의 발길이 닿았다 하여 왕지재 또는 왕등재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지금은 그 흔적이 아무것도 없다.

 

왕등재 습지는 생태계의 보고다. 아래는 샘이 있다.


왕등재에서 왕등재 습지까지는 꽤 먼거리다. 오랜 세월 동안 동식물이 죽고 분해되어 퇴적된 유기물 속에서 수많은 기초생물들이 재탄생하고 또 기초생물들을 먹이로 하여 고등생물들이 살아간다. 이탄층은 고산지대의 낮은 온도 때문에 죽은 식물들이 제대로 미생물 분해가 이뤄지지 않은 채 쌓여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런 이탄층으로 형성된 습지를 이탄습지라고 하는데 왕등재 습지가 대표적인 이탄습지다.

 

대표적인 이탄습지인 왕등재 습지


습지대는 물을 구할 있다. 물이 귀한 동부능선길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배낭 무게를 줄일 수 있다. 새재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아래로 대원사 계곡이 내려다 보인다. 무척 긴 계곡이다.

대한을 지난지 며칠 되는데 양지쪽 나뭇가지에 꽃봉오리가 제법 커졌다. 아직 봄이 먼데 벌써 봄을 기다린다. 온난화 현상으로 예전의 기록들은 바뀌어 간다. 올해도 봄이 빨리 오고 지리산에는 고로수 수액 채취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대원사에서 실상사로 넘나들던 옛길인 새재는 그 길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걷는 이 가 없고 차량으로 돌아다닌 탓이다.

 

철이른 꽃망울과 새재 안내표지


새재를 지나면 산죽이 한키도 넘는 산죽 숲을 헤치고 걷는 길이다. 길이가 200m도 넘는 대숲 길도 나오고 자주 산죽밭을 만난다. 어제 짙은 안개와 비가 내렸는데 여기는 산이 높아 눈이 내렸다. 오후로 가면서 내린 눈이 녹으니 산죽밭을 지날 때면 빗속을 지난 듯 옷이 흠뻑 젖는다. 한겨울 1월 하순에 비에 젖은 듯 옷이 젖기는 처음이다. 스페츠를 착용해도 물은 용하게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양발마저 적신다.

 

산죽밭을 지나는 길과 설화가 곱게 핀 노송
나무 끝에 핀 상고대


날이 추우면 멋진 겨울풍경을 만날 수 있을 텐데 내린 눈이 습설이라 닿으면 녹는다. 응달은 눈이 얼어 미끄럽고 바윗길을 오르는 길도 있다. 누군가 매달아 놓은 줄을 잡고 힘겹게 오르는 길이다. 등에 맨 배낭 무게로 중심잡기가 만만하지 않다. 점점 진행 속도가 늦어진다. 아무렴 어떠랴. 그냥 발가는 데로 걸어도 좋은 지리산 길이다.

지리 옹바위는 일명 독바위라 한다. 멀리서 보면 옹기로 만든 단지 같이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옹기로 만든 독이라 하여 옹 바위 혹은 독바위라 부른다. 옛사람들은 그 모양을 보고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지리 옹바위 혹은 독바위와 마주 보는 2개의 바위


높이를 더하니 쌓인 눈이 많다. 아래는 눈이 없지만 높이에 따라 기온이 낮으니 녹지 않고 눈이 그대로다. 응달로 겨울의 눈꽃 상고대가 바다의 산호초 같이 곱게 얼어 있다. 겨울산은 역시 눈이나 상고대가 피어야 제격이다. 자연이 만든 예술품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이런 작품은 만들 수 없다.

동녘이라 하늘의 해도 기울어져 응달이 되었다. 지금부터 오늘은 어디서 하룻밤을 자야 하나 잠자리 터를 잡아야 한다. 하룻밤 자고 떠날 곳이지만 아무 데나 한댓잠을 잘 수 없다. 첫째 북풍을 막아 주는 바람이 불지 않은 장소라야 한다. 둘째는 땅이 평평한 곳이라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터 잡기가 만만하지 않다. 계곡의 물은 추위로 꽁꽁 얼어붙었다. 식수는 눈을 녹여 사용해야 한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러셀하며 걷는 길의 끝에 비박
계곡이 얼어 식수는 눈녹여 사용

두류봉 아래 눈위에 탠트를 쳤다. 탠트의 외피 내피로 된 천조각 2겹이지만 그 안과 밖은 하늘과 땅만큼 기온차가 있다. 동계 산행은 탠트 안에서 모든 것 다 해결해야 한다. 음식을 만드는 것부터 먹는 것 설거지까지 모두 처리해야 한다. 밖은 너무 춥기 때문이다. 준비해 간 핫팩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한번 발열을 하면 7~8시간 지속이 된다. 그것 2개면 한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버너의 연료는 겨울산행에는 좀 넉넉히 가져와야 한다. 취사뿐만 아니라 난방에도 사용한다.

 

눈 녹인 물로 끓인 커피맛은 엄지척!


어둠이 찾아 오면 할 일이 없다. 오직 할 수 있는 건 생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거기에 양주 한잔은 엄지 척이다. 면벽수행에 최고의 시간이다. 불교에서 하는 좌선의 하나지만 깊은 산중 밤하늘에 선택할 수 있는 게 면벽수행의 시간이라 생각하면 최고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겨울바람만 지리산의 정적을 깬다. 거기에 내가 있고 지리산이 있고 겨울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