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달림의 걷기여행과 마라톤 그리고 등산
동계 설악산 한계령에서 공룡능선 넘기 본문
눈이 내리면 설악을 가겠다는 계획을 했다. 눈이 귀한 요즘 겨울철에 설악다운 설악을 만나려면 눈이 있어야 한다. 19일 날 설악은 눈 예보로 입산이 통제되었고 20cm의 눈이 내렸고 20일 날 10시에 입산통제가 풀렸다.
21일 금요 무박 2일로 설악을 가는 산악회 버스가 있어 함께 했다. 사당역을 23:20에 출발하여 양재, 복정에서 산객을 싣고 한계령으로 향했다. 새벽 3:20에 내리니 매서운 설악의 밤바람이 사정없이 몰아 친다. 4시 입산시간이라 휴게소 바람이 적게 부는 곳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스틱을 챙기고 헤드랜턴을 켜고 기다렸다.
정각 4시에 철문이 열린다. 몇몇 산악회에서 온 산객 50여 명이 산행을 시작한다. 여성분 10여 명은 되는 것 같다. 열 번째 정도에서 출발하면 바로 가파른 계단이 어서 오라고 맞이한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한 발 한 발 높이를 더한다.
한계령 코스는 한계삼거리까지 가파르게 오른다. 20cm의 눈이 내려 랜턴에 비치는 눈은 보석 같이 반짝인다. 밤 길은 랜턴에 비치는 곳만 본다. 앞으로 디딜 발걸음만 보인다. 들리는 건 밤바람 소리뿐이다.
눈이 내린 후에 아무도 걷지 않은 신설을 밟고 걷는 길이다. 뽀드득하는 눈 밟는 소리가 좋다. 이 맛에 잠도 자지 못하고 신 새벽에 산길을 걷는다. 오직 나와 산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런 길을 걷는 게 좋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서북능선 한계령 삼거리에 올랐다. 왼쪽 길은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대청봉으로 가는 길이다. 추운 날씨에 산바람이 세게 불어 물 한 모금 마셔주고 걸었다. 아직 아침에 오려면 긴 시간이 남았다. 끝청쯤에 가야 여명이 올 것 같다.
자주 걷던 길이라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 하는 주목나무를 지나면 전망 좋은 나무계단을 내려간다. 이곳에서 내설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지만 그믐으로 가는 달빛으로는 여렴 풋이 보인다. 너널지대를 지날 때는 눈이 내려 조심해야 하는 구간이다. 자칫 눈에 미끄러지면 바위틈에 다리가 낄 수도 있다.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아이젠의 금속성 소리가 밤공기를 깬다.
선두에 가던 분이 길에서 슬며시 벗어난다. 갑자기 리딩이 되었다. 20여 년 전에 백두대간 종주 때 리딩을 하고 그 후로는 내려놓은 자리다. 정신줄을 잡고 눈이 내린 길에 인적이 느껴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다니던 길은 20cm의 눈으로 덮여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능선은 설악의 바람이 눈을 날려서 길이 보이지 않게 쌓아 놓기도 한다. 여간 집중해 보지 않으면 눈이 내린 밤길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집중에 집중을 해야 한다.
뒤를 돌아보면 줄줄이 이어져 오는 랜턴 불빛이 선을 이루고 있다. 인공물이라곤 가끔 만나는 나무계단과 국공에서 설치한 이정목과 야광 테이프뿐이다. 그것도 촘촘히 있는 게 아니라 가끔씩 있다. 때로는 능선으로 길이 이어지다가 산허리를 돌아서 가기도 한다.
7시경이 되어야 여염이 밝아 올 텐데 걸어야 할 길이 멀다. 다행인 점은 끝청으로 가는 길은 그리 된비알은 없어 체력소모는 적다. 속도도 어느 정도 걸어 줘야지 늦으면 전체 산행속도가 떨어진다. 1년에 2 ~ 3차례 걸은 길이라 느낌으로 걷는다. 바로 뒤에 오는 분은 좀 젊게 느껴진다. 바짝 따라오길래 옆으로 비켜서면서 먼저 가시죠 했더니 힘드네요 하며 그도 비켜선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앞서 걷는다.
눈이 쌓이면 그 길이 그 길 같고 확실히 구분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길이 아닌 길을 가도 모두 발자국을 따라 오기에 조심스럽다. 혹시나 길을 잘못 걸어 돌아 가면 뒷머리가 간질 거리기도 한다. 그게 세상의 인심이다. 10번 잘하다고도 1번만 못하면 욕하는 게 세상 인심이다.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끝청이 가까워 올 때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온다. 헤드 랜턴의 불빛이 점점 밝기를 잃어간다. 밤 산행은 경주마가 앞만 보고 달리게 하듯 랜턴 불빛만 보고 걷기에 집중해서 걸을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
끝청봉에 올라 서니 동녘 하늘이 점점 붉기를 더해간다. 중청을 돌아 중청대피소에 들려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에 인기 메뉴는 라면이다. 혹한에 뜨거운 국물만큼 좋은 음식은 없다. 설악에서 먹는 라면만큼 맛있는 라면은 세상에 없다.
대청봉으로는 600m는 설악에서 가장 멀고 힘든 길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힘을 빼놓고 오르는 길에는 설악의 바닷바람이 분다. 대청봉은 한라, 지리에 이어 3번째 높이의 산이다. 바다가 가장 가까이 보이는 산이기도 하다.
남설악 쪽으로 운해가 가득하다. 설악이 구름 위에 떠 있는 섬과 같이 느껴진다. 이걸 선경이라 하나보다. 대청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겨울바람에 오래 버틸 제간이 없다. 늘 정상석에 늘어진 긴 줄도 없다. 오래도록 안아도 된다고 양 품을 내어준다.
하산길은 겨울 공룡능선길로 잡았다. 오랜만에 겨울철에 넘는다. 코로나 이전에는 중청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걸었지만 숙박이 되지 않으니 당일 산행으로 끝내야 한다. 소청을 지나 희운각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 길이다. 거기에 눈이 내려 길은 썰매장 같이 미끄럽다. 아이젠으로 버티려면 다리 힘이 큰 역할을 한다. 자칫 미끄러지면 엉덩이 썰매를 타야 한다.
균형과 버티는 힘을 잘 사용해야 미끄러지지 않고 빠르게 내려갈 수 있다. 눈길은 종합훈련장 같은 느낌이다. 자주 만나는 바위도 조심해야 한다. 내려 서면 희운각이다. 희운각은 최태묵 님이 사재를 털어 1969년 10월 산악인을 위해 이곳 산장을 지으신 서예가인 최태묵 님의 호다. 요즘 건물의 노후화로 옆에 새로 대피소를 짓는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공룡능선은 동절기에는 입산 마감시간이 10시까지다. 서둘러 왔건만 10시가 가깝다. 길을 재촉해야겠다. 폭설 시에는 고립지역으로 2인 이상 동반 산행을 권한다. 초입부터 신선봉을 올라 가려면 파이프를 잡고 20여 m 바위벽을 올라야 한다. 완력과 지구력이 필요한 구간이다. 공룡능선은 그 등줄기가 공룡의 등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높낮이 뿐만 아니라 바위 구간이 많아 험한 구간이다.
오죽 험했으면 공룡능선이란 이름이라 붙여졌을까 싶다. 이 능선의 중간에는 1275봉이 있고 앞으로는 설악에서 가장 멋진 바위인 범봉이 자리하고 있다. 범봉으로 가는 바윗길을 천화대길로 암벽등반 길이다.
공룡능선의 끝자락은 마등령이다. 오세암과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삼거리 분기점이다. 예전에는 속초에서 이 길로 말에 짐을 싣고 원통 5일장을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왼쪽으로 우뚝 솟은 바위봉이 세존봉이다. 불가에서 이름 붙여진 봉으로 내려가면서 만날 금강굴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설악 종주에 가장 힘든 구간이 비선대까지 내려가는 구간이다. 8시간 정도 산행을 한 후반이라 체력적 부담이 크고 바위 계단이 많은 구간이다. 바윗길은 충격이 커 더욱 조심되는 길이다. 장군봉 중간쯤에 암벽에 굴이 있다. 이 바위굴에서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수행하던 굴로 지금도 불자들이 찾는 굴이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은 비선대까지 내려와야 한다. 예전엔 산장과 상가가 있었지만 말끔히 정리했다. 험난한 바위길이 끝나고 평지나 다름없는 천불동 초입이 비선대다. 와선대를 지나면 소나무와 참나무가 이루는 숲길에서 오랜만에 흙길의 고마움을 느낀다.
군량장을 지나 신흥사 통일 청동대불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는 산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신흥사 일주문을 지나 소공원 입구에 있는 반달 가슴곰이 반갑게 맞아 준다. 여기가 이 길의 날머리다. 23km의 설악 종주산행은 여기서 맺는다. 긴 길을 아프다 하지 않고 잘 버티어준 다리에게 고맙다고 토닥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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